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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4 내 꿈이었던..5
2007. 8. 14. 17:09 Memories

[오마이뉴스 이정래 기자] 1993년은 한국 프로야구에 축복을 안겨준 시즌이었다. 1993년은 2000안타의 신화를 쓴 '파란피의 사나이' 양준혁이 상무를 거쳐 프로무대에 이름을 드러낸 시즌이었고, 14타자 연속 탈삼진의 '야생마' 이상훈, 국가대표의 두 에이스 구대성과 김홍집이 프로에 입단을 한 시즌이었다. 그리고 '야구 천재' 이종범이 한국 프로야구에 등장을 했던 시즌도 바로 1993년이었다.

'야구 천재' 이종범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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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KIA 타이거즈 
 

1992년 해태 타이거즈는 광주일고-건국대 출신의 국가대표 유격수 이종범을 1993년 신인 1차지명 선수로 지명을 한다. 그해 대학 추계리그에서 .571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연고지 출신의 스타였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종범에게 해태측이 안겨준 계약금은 7천만원이었다. 당시 이상훈이 LG에게 계약금으로만 1억8천8백만원을 받는 등 대부분의 1차 지명 선수들이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았지만 해태는 투수도 아닌 내야수 이종범의 가능성만 믿고 배팅을 하는 팀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프로야구를 호령하던 해태에게 이종범은 크게 아쉬운 선수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지훈련에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타구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리는 등 이종범의 출발도 매우 좋지가 않았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되고 이종범이 프로야구 팬들에게 보여준 것은 1번 타자의 혁명과도 같았다. 이종범은 그해 무려 73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1989년 김일권(당시 태평양)이 세운 한 시즌 최다도루 신기록을 갈아치웠다.(이종범은 당시 한 경기 6개의 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00m를 11초05에 달리는 이종범은 단지 발만 빠른 선수가 아니었다.

그해 이종범은 신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전 경기(126경기)에 출장을 하며 133개의 안타를 기록, OB의 김형석(당시 147개)에 이어 최다 안타 2위를 기록하는 등 타격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또한 팀에서 가장 많은 16개의 홈런(4위)을 기록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장타력도 보여주었다. 여기에 한 경기에서 세 개의 안타를 막아낸다는 유격수 이종범의 수비 역시 전성기의 김재박과 유중일에 비견 될 만큼 대단했다.

엄청난 활약을 했지만 이종범은 그해 신인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같은 해 프로에 들어온 양준혁이 .341의 타율과 23개의 홈런 90타점을 기록하며 타격 1위·타점 2위·홈런 2위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대신 이종범은 한국시리즈에서 9안타 7도루 4타점의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시키고 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당시 이종범은 한국시리즈 MVP 수상 소감 인터뷰에서 " 이제 내가 한 것만큼 받고 싶다 " 며 신인 계약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종범의 1993년은 눈부시게 화려했지만 이 당돌한 '야구천재'가 불과 2년차에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다시 쓸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1994년 프로 2년차에 접어든 이종범은 타격 전 부문을 휩쓸며 프로야구에 '이종범 광풍'을 몰고 왔다. 94년 이종범은 124경기에 출장을 해 196개의 안타를 때려냈으며 .393의 타율과 19개의 홈런,77타점,84개의 도루를 기록, 최다안타 1위·타율 1위·홈런 4위·타점 5위·도루 1위에 올랐으며 타율 역대 2위, 안타와 도루는 역대 1위를 기록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종범은 시즌 종반까지도 타율 4할-200안타-20홈런-100도루 달성을 예상케 하는 놀라운 능력 보여주며 1994년을 완벽하게 지배했다. 당시 이종범의 활약은 충격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에 이런 선수는 없었다. '야구 천재'라는 별명만으로 이종범의 1994년을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이종범은 4번 타자 보다 더 무서운 1번 타자였다.

입단 2년 만에 프로야구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이종범은 1997년까지 매 시즌 .320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97년에는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는 등 입단 후 5년 동안 713개의 안타와 106개의 홈런 그리고 310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했으며 특히 97년에는 30개의 고의사구를 얻어냈을 정도로 투수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국내에서는 더 이상 오를 곳도 이뤄야 할 목표도 사라진 이종범은 본격적으로 해외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주니치에서 보낸 쓰라린 3년의 세월

 
 

1997년 시즌을 마친 후 이종범은 많은 논란 끝에 야수로는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을 했다. 당시 국내 야구 스타들의 해외 유출에 대한 비난 여론이 팽배했고 박건배 구단주 역시 이종범의 일본 진출을 반대했지만 해태는 에이스급 투수 조계현을 4억원에 삼성에 넘길 정도로 자금에 압박을 받는 상태였다. 결국 해태는 이적료 4억5천만엔에 이종범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즈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종범의 야구가 일본 무대 정복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종범의 일본 프로야구 정복기는 아쉬운 실패로 끝났다. 이종범은 데뷔 첫 해였던 98년 6월 23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상대편 투수 가와지리가 던진 공에 오른쪽 팔꿈치를 맞고 쓰러졌다. 부상 전까지 타율 .285를 기록하며 볼넷 3위·출루율 5위·도루 1위에 오르며 일본 투수들을 괴롭히던 이종범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당시 이종범은 6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 이 부문 센트럴리그 1위에 올랐을 정도로 일본 투수들의 심한 견제를 받았었다.)

거칠 것 없이 질주하던 이종범의 날개가 부러진 것도, 몸 쪽 공에 대한 부담감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부상을 회복하고 다시 돌아왔지만 팀 내 경쟁자였던 외국인 타자 데이비드 닐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지 못하고 서서히 자리를 빼앗겼으며 대형 신인 유격수 후쿠도메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주고 외야수로 보직을 변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종범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타율 .261 27홈런 99타점 53도루라는 성적을 남긴 채 2001년 시즌 중반 한국 프로야구로 돌아왔다. '야구 천재' 이종범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었다. 이종범의 일본 프로야구 정복의 꿈이, 뜻하지 않은 부상과 원형 탈모증가지 생겼을 정도의 엄청난 심적 부담감에 꺾여버린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마음의 안정을 얻은 이종범은 2005년 타율 .315 20홈런 50도루를 기록하는 등 예년의 기량을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어느덧 이종범은 한국나이로 38살의 노장이 되었다. KIA 타이거즈는 올 시즌 최하위를 달리고 있고 올 시즌 .244라는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이종범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시즌 도중 은퇴설이 나올 정도로 이종범은 무력해져있다. 이종범은 이렇게 은퇴할 수는 없다고 이를 악물고 있지만 마음만으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야구 천재' 이종범을 이제 그라운드에서 떠나 보내야하는 시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종범에게 야구를 처음 가르쳐 주었던 광주 서림 초등학교 최성구 감독은 이종범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 종범이가 체구는 작지만 잘 때리고 순발력도 있었다. 야구 시작한 지 불과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6학년들 간의 경기에서 점수 차가 많이 벌어져 3학년인 종범이를 유격수로 내보냈더니 너무도 잘 해냈다. 이때부터 이종범은 팀의 주전으로 뛰었다 " 타고난 재능을 가졌던 이종범은 행복한 선수다. 세월이 한참을 흘러도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영원한 야구 천재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종범은 야구 천재로 불리는 것을 싫어 할 지도 모른다. 이종범은 야구 천재를 넘어 야구 대통령을 꿈꾸었기 때문에….


posted by 기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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